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드 라 로크 (문단 편집) === 불의 십자단 활동 === >'''"프랑스 인종은 위대한 종합이다. 그것은 전체를 이룬다. 언어 연구도 유전 분석도 이 사실을 거스를 수는 없다. 지리적 출신과 종교적 신념도 통용될 여지는 없다. 오직 그들이 진실하고 검증된 확신에 차 있는 한에서 프랑스인의 자질과 헌신만이 중요하다."''' >---- >프랑스 민족주의에 대한 라 로크의 견해 ||[[파일:행진하는라로크.jpg|width=100%]]|| || 개선문 앞에서 행진하는 라 로크 || 하지만 라 로크는 단순한 수꼴이 아니라서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드레퓌스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당시 반유대주의에 찌들어 있던 프랑스의 다른 우파들과 달리 반유대주의를 반대하여 일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으며 <불의 십자가의 아들과 딸>, 여성단체인 <프랑스사회운동>, <민족 의용대> 등 여러 단체를 만들어 여성, 어린이, 노동자 등의 지지를 끌어내고자 했다. 이어 그는 <디스포스>라 불리는 준군사단체를 조직하여 1933년과 1934년에 걸쳐 무력시위를 감행했고 공산주의 폭동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디스포스, 기동돌격대, 민족의용대 등은 좌파의 반대 시위에 맞서는 돌격대 역할을 했으며 불의 십자단은 수천대의 차량을 동원하여 군대의 사열식을 방불케 하는 거창한 퍼레이드를 전개하곤 했다. 나중에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프랑수아 미테랑]]도 이때 민족의용대 파리 3지부에 18세의 나이로 가입했다.[* 미테랑은 1994년 9월 12일 인터뷰에서 가입 15일만에 환멸을 느꼈다고 주장했다.] [[1934년 프랑스 폭동|1934년 2월 6일 하원의사당 앞의 극우파 시위에서 극우 가두시위대가 대규모 행진을 벌이다가 15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는데 불의 십자단은 시위는 참여했으나 다른 극우파들의 폭동에는 가담하지 않고 질서를 지켰다. 이에 3만 5천명이었던 불의 십자단 회원수는 1935년 22만 8천명으로, 다시 50만명으로 폭증하였다. 불의 십자단의 급격한 성장에 좌파들은 불의 십자단이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면서 크게 경계하였다. 하지만 히틀러와 달리 라 로크는 불의 십자단이 벌이는 모든 집회와 행진을 멀리서 구경할 뿐 참여하진 않았으며 공식석상에서 무분별한 폭력행위를 비난하면서 자신의 집단이 엄격한 규율과 질서를 갖추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라 로크는 곧 제3공화국을 타도할 D-DAY가 오고 있다는 선동적인 발언을 하였으며 히틀러는 경계했지만 무솔리니에 대해서는 친근감을 보였다. 이러한 반마르크스, 반혁명 구호들은 라 로크가 프랑스의 부르주아들의 지지를 받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보르고 공작, 전기산업 재벌 에른스트 메르시에, 화장품 업계 재벌 프랑수아 코티, 철강업계 재벌 프랑수아 드 벵델 등 프랑스의 귀족과 재벌들이 라 로크를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프랑스 최대 보수정당인 공화주의 연맹도 불의 십자단과 연정을 시도했다. 하지만 라 로크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일반적인 프랑스 우파와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라 로크는 이윤 공정 배분, 우수한 노동자들에 대한 유급휴가 제도, [[최저임금제]], 직업조합 창설 등을 주장하며 산업 노동자들의 지지를 추구했고 또한 농업노동자들에 대한 '우호적 대우'를 호소하고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부농들에게 빈농들에게 양보할 것을 촉구했다. 이 때문에 1934년 시점에서 부르주아들이 압도적인 구성을 차지했던 불의 십자단은 기존의 지원세력인 부르주아와 갈등하게 되었다. 한편 반유대주의와 [[장검의 밤]]에 대해서 라 로크는 "라틴적 분별"에 위배되는 "독일적 잔혹함", "폭정과 종교재판의 체제"라고 비난했으며 국가주의적 예속을 강요하는 파시즘은 "우리 인종의 절도 있는 개인주의"와 다르다면서 [[파시즘]]에 대해선 반대하고 공화주의를 지지했다. 하지만 알자스-로렌의 불의 십자단 지부는 [[반유대주의]]를 공개적으로 옹호했고 라 로크 역시 반유대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평가된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열렬히 옹호했다. 이 때문에 그가 파시스트였는지 아닌지는 아직까지도 논란 대상이다. 자세한 것은 [[프랑스 파시즘]]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